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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밝혀진 난중일기

aazoo 2008. 4. 9. 21:01

"희로애락 감정 숨김없이… '인간 이순신'에 놀라"

'난중일기' 누락 32일치 내용 밝힌 노승석 순천향대 교수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노승석 교수는“충무공과 관련된 다른 사료들에

 대한 해독과 번역작업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를 번역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들이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어요. 충무공도 보통사람들처럼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누락됐던 32일치의 일기 내용〈본지 2일자 A1·A10면 보도〉을 밝혀낸 노승석(盧承奭·39)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40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일기는 돌아간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전란을 치르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강직한 면모, 백성과 군사들을 아끼는 자상함이 잘 드러나 있다.

본지 단독 보도 직후 문화재청의 긴급 브리핑에 모습을 드러낸 노 교수를 보고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암호문과도 같은 초서(草書)의 내용을 모두 해독한 사람이 백발의 한학자가 아니라 30대의 젊은 학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난중일기》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가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4년 35세의 나이로 《난중일기》의 13만자(字) 전편(全篇)을 DB(데이터베이스)화하는 데 성공했고, 2005년에는 누락되거나 잘못된 글자를 모두 바로잡은 《난중일기》의 첫 완역본을 냈다. 이때 바로잡은 글자만 150자(字)가 넘는다.

그는 청명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과 동문수학했던 부친 노상구(盧相九)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접하며 자랐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일기가 실린 문서가 다름아닌 현충사 소장 《충무공유사》였고, 더구나 책 제목도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뜻밖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다. 자료 번역을 위해《충무공유사》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런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도 초서로 쓰여진 우리 문서들 중 대다수가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묵묵히 담고 있는 셈이다."

―새로 밝혀진 일기 내용에 대해 '뒷담화 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충무공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적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도원수 권율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라는 부분들은 후세의 우리로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데….

"남에게 보여주려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은 부분이라 그럴 것이다. 이 부분이 나중에 《이충무공전서》에서 빠진 것도 대단히 민감한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 이순신'이 달랐던 점은 그 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면에서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데 있다. 그것이 위인(偉人)과 범인(凡人)의 차이일 것이다."

―《난중일기》의 판본이 복잡하다는 것도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1795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 당시 편의상 붙인 것이다. 원래는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을미일기〉의 친필 초고본이 모두 유실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내용만 전해졌다. 새로 밝혀진 일기 32일치 중 29일치가 〈을미일기〉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존 초고본에 없는 병신년(1596)과 무술년(1598)의 일기 3일치는 어떻게 된 것인가?

"충무공은 전란중에 일기를 적을 때 경황이 없어 대충 써 놓고는 나중에 다시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유일기〉의 경우 다시 정리한 〈속 정유일기〉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 3일치는 충무공이 비망록 형식으로 따로 적어 놓았으나 지금은 없어진 부분으로 보인다."

―지난해 7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전문위원 겸 대우교수가 됐다. 무슨 활동을 하고 있나?

"《충무공유사》를 비롯한 《난중일기》의 이본(異本)들을 번역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충무공 관련 문헌사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학기부터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난중일기 강독'이란 강의를 개설했다. 《난중일기》를 텍스트로 삼아 충무공의 리더십을 가르치는 것인데, 학생들이 110여 명이나 수강하고 있어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난중일기》의 정본(定本)을 만들 계획이다."


 

난중일기 '빠진 32일치' 일반 공개

문화재청, 인터넷으로 제공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누락됐다가 새로 그 내용이 밝혀진 32일치의 일기 전문(全文)이 공개됐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2일 오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긴급 기자브리핑을 열어 해당 내용을 모두 공개하고, "일기 내용이 수록된 현충사 소장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다른 이름은 '재조번방지초') 전체에 대한 번역 사업의 결과를 현충사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일반에 제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이번 32일치의 일기 내용은 기존의 '난중일기'에 없는 새로운 것으로, 앞으로 귀중한 연구자료로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이 2일 언론에 공개한 ‘충무공유사’ 중 새로 밝혀진 ‘난중일기’ 32일치의 번역문과 원문 전문(全文), 해설이다.

 

※ 을미일기 새로운 내용  

 

      을미년 정월10일

  • 순천 부사(順天府使)도 공사(公私)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 들였다.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 順川公私禮 姑留之 而有頃招入 同坐饋酒之際 言辭極兇慘


    을미년 정월12일

     12일,삼경(三更,자정쯤)에 꿈을 꾸니 선군(先君,부친)께서 와서 분부하기를 “13일에 회( )를 초례(醮禮)하여 장가보내는데 날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비록 4일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이에 완전히 평일과 같이 하게 되어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 十二日 三更夢先君來敎 十三日送醮 往 似有不合 雖四日送之無妨爲敎 完如平日 懷想獨坐 戀淚難禁也


    을미년 정월14일

     14일,사천 현감(泗川縣監)[기직남(奇直男)]이 와서 이르기를 “새로 온 수사(水使)선거이(宣居怡)가 병으로 면직서(免職書)를 올려 진주 목사(晉州牧使)배설(裵楔)이 이를 대신 맡았다”고 하였다.

    ⇒ 十四日 泗川來云 新水使宣居怡 以病呈免 晉州牧裵楔爲之云


    을미년 정월15일

     15일,우후(虞候)이몽구(李夢龜)와 여필(汝弼)이 왔다.이 편에 “이천주(李天柱)씨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경탄함을 이기지 못했다.천리밖의 땅에 던져진 사람이 만나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더욱 애통과 슬픔이 심했다.

    ⇒ 十五日 虞候李夢龜及汝弼來 聞李天柱氏 不意暴逝云 不勝驚嘆 千里投人 不見而奄逝 尤極痛悼


    을미년 정월21일

     21일,오늘이 바로 회( )가 전안(奠雁,혼례)하는 날이니,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장흥 부사(長興府使)[전봉(田鳳)]가 술을 가지고 왔다 ……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官府)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더욱 놀랍다.

    ⇒ 二十一日 乃 奠雁之日 心慮如何 長興佩酒來 … 其京妾亦率來于其府云 尤可駭也


    을미년 정월27일

     27일,가리포(加里浦)첨사(僉使)[이응표(李應彪)]를 통하여 여옥(汝沃)형의 부음(訃音)을 들으니,놀랍고 애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 二十七日 因加里浦 聞汝沃兄訃 不勝驚痛


    을미년 2월9일

     2월 초9일,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한 방향에 걸렸는데,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홀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남들도 보게 했지만,남들은 볼 수 없었다.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화룡(畵龍)이 되어 있었고,내가 한참동안 어루만지며 완상(玩賞)하는데 그 빛과 형상이 움직이니 기위(奇偉,특이하고 웅장함)하다고 할만 했다.기이한 길상(吉祥)함이 많은 것 같기에 여기에 적는다.

    ⇒ 二月初九日 夢西南間 赤靑龍掛在一方 其形屈曲 余獨觀之 指而使人見之 人不能見 回首之間 來入壁間 因爲畵龍 吾撫玩移時 其色形動搖 可謂奇偉 多有異祥 故記之


    을미년 2월27일

     나는 또한 임시방편으로 손을 꼽으며 대비책을 묻다가 해가 저물어서 파하고 돌아왔다.그의 꼴을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 吾亦姑息 指問備策 日暮罷歸 其爲形狀 不可言


    을미년 3월7일

     7일,우수사(右水使,이억기)가 만나러 왔다.정원명(鄭元明)과 순천(順天)군관(軍官)의 일로 말 기운과 낯빛이 매우 급하니 우습다.

    ⇒ 七日 右水使來見 以鄭元明順天軍官事 辭色甚遽 可笑


    을미년 3월16일

     그의 사돈(査頓)이호문(李好問)이 또한 붙잡혔다고 했다.

    ⇒ 其査頓李好問 亦爲被拿云


    을미년 3월24일

     24일,우수사(右水使,이억기)는 앉을 청당(廳堂,대청)을 개수(改修)하여 세우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헛소리를 많이 하며 보고해 왔다.매우 놀랍다.

    ⇒ 二十四日 右水使以坐廳改立爲惡 多費辭報來 可愕可愕


    을미년 4월3일

     4월 초3일,상량(上樑)하였다.도리(道里)를 올렸다.

    ⇒ 四月初三日 上樑 上道里


    을미년 4월13일

     13일,대청(大廳)의 공사를 마쳤다.

    ⇒ 十三日 大廳畢


    을미년 4월19일

     19일,아침에 납채(納采,혼례예물을 보냄)하는 글을 쓰고 아울러 조카 해( )의 합근(合 ,혼례)용품을 갖추었다.이영남(李英男)의 장계(狀啓)의 회답[回下]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남해 현령(南海縣令)을 효시(梟示)하라는 것이었다.

    ⇒ 十九日 朝書采文幷 姪 合 之俱 李英男啓回下 下來則南海梟示云


    을미년 4월30일

     30일,아침에 원수(元帥)[권율]의 계본(啓本)과 기(奇) 이(李)씨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녕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괴이하다.

    ⇒  日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을미년 7월1일

     내일은 부친의 생신이신데,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 明日乃父親辰日 悲戀懷想 不覺涕下


    을미년 8월5일

     그는 곧 “안무어사(安撫御史)통훈대부(通訓大夫)행사헌부집의(行司憲府執義)겸지제교(兼知製敎)인 신식(申湜)으로 자(字)가 숙정(叔正)이고,신해생(辛亥生)이며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서울에 산다”고 하였다.

    ⇒ 乃安撫御使通訓大夫 行司憲府執義兼知製敎 申湜字叔正 辛亥生 本高靈居京云


    을미년 8월22일

     강을 건너 주인집에 갔다가 그길로 체찰사의 하처(下處,임시숙소)로 가니 먼저 사천현에 와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변명을 하였다.우습다.

    ⇒ 渡江入主人家 因到體察下處 則以先到泗川縣宿 而不爲迎命爲言 可笑


    을미년 8월23일

     늦게 진주(晉州)에서 전쟁으로 죽은 장수와 병사의 위령제(慰靈祭)를 지낸다는 전언(傳言)을 듣고, …… 체찰사가 나를 부르며 분부하기를 “먼저 배가 있는 곳에 가서 배를 타고 소비포(所非浦)로 돌아가 정박하라”고 하였다.그래서 선박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

    ⇒ 晩聞晉州戰亡將士慰祭之傳 … 體察招敎曰 先往舡所 乘船回泊于所非浦云 故還到舡泊處 


    을미년 9월12일

     충청(忠淸)수사[水使]와 박 조방장(朴助防將)이 함께 왔는데,신 조방장(申助防將)은 병으로 오지 않았다.언경(彦卿,권언경)이 홀로 남아 이야기를 할 때 사립(思立,정사립)에 대하여 언급하는데,우수사[이억기(李億祺)]를 통해 들었다면서,“그(사립)는 인륜강상(人倫綱常)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렸다”는 것이었다.지극히 놀라운 일이다.경수(景受)[이억기]는 어찌하여 이런 무리(無理)한 말을 한 것인가.그 복이 되지 못할 것을 생각할 수 있다. 

    ⇒ 忠淸[水使]及朴助防來共 而申助防病不來 彦卿獨留話之際 言及思立 因聞右水 則亂倫敗常云 極愕極愕 景受何如是發此無理之言耶 其爲非福 可想


    을미년 9월14일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助防將)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

    ⇒ 忠淸水使及兩助防將 同朝食


    을미년 9월25일

     25일,새벽 2시경에 배에서 내렸다.이른 아침에 목욕소에 이르러 식사 후 목욕을 하고 배에 올랐다.음식을 조리할 때 시간이 ……

    ⇒ 四更下舡 平明到湯子 食後沐浴上舡 調理之際 日當


    을미년 10월3일

     10월 초3일,오늘은 회( )의 생일(生日)이다.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추어 주도록 예방(禮房)에 당부하였다.

    ⇒ 十月初三日 乃 生日 故酒食備給事 [言及][禮]房


    을미년 10월21일

     21일,사립(思立,정사립)을 통하여 들으니,“경상수백(慶尙水伯)[권준(權俊)]이 모함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미는데 내키는대로 문서를 작성하고,문서로 적게 되면 오로지 알려지지 않게 했다”고 하였다.매우 놀랍다.권수사(權水使)의 사람됨이 어찌하여 그처럼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가.늦게 미조항(彌助項)첨사(僉使)성윤문(成允文)이 와서 권준 수사(水使)의 형편 없음는 모습을 많이 말했다.

    ⇒ 二十一日 因思立 聞慶水伯飾誣陷辭 倚指成文之 而文之則專不聞之云 可駭可駭 權水之爲人 何如是誣妄耶 晩彌助項僉使成[允(文)]來 多言權水之無狀


    을미년 10월26일

     26일,장인의 기일(忌日)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 二十六日 以聘忌不坐


    을미년 10월28일

     28일,밤 8시경에 거센 바람과 폭우가 크게 일었다.밤 10시경에 우레가 치고 비가 와서 여름철과 같으니 변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 二十八日初更 狂風驟雨大作 二更雷雨有同夏日 變怪至此


    을미년 11월1일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기망(欺罔)하는 말들은 무엇으로도 형상(形狀)하기 어려우니 천지사이에는 이 원균(元均)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 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을미년 11월4일

     4일,직장(直長)이여옥(李汝沃)형 집에서 이보(李 )의 편지가 오니 비통함을 참지 못했다.곧바로 답서(答書)를 작성하여 보( )에게 보냈다.쌀 2곡(斛,10말)과 6장(丈)의 유둔(油芚,4장(丈)의 유둔(油芚)과 잡물(雜物)등의 삼단[三端,양사]을 또한 찾아서 보내도록 분부하였다 …… 우리 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 李直長汝沃兄家 簡來 則不勝悲慟 卽修答書 送于 處 白粒二斛 六丈油芚 四丈油芚與雜物等三端 亦覓送事敎之 … 我國兵殘力疲 奈如之何


    을미년 11월28일

     이 날이 장인의 기일(忌日)이기도 하여 종일토록 나가지 않았다.

    ⇒ 是日乃女舅忌 終日不出


    병신년 1월4일

     초4일 진영(陣營)에 이르렀다.

    ⇒ 初四日 到陣


    정유년 7월24일

     7월 24일,복병장(伏兵將)녹도 만호(鹿島萬戶)송여종(宋汝悰)이 전선(戰船)8척을 거두다가 전선 12척을 절이도(折 島)에서 만나 6척을 통째로 포획하여 적군의 머리 69급(級)을 베고 용기를 발휘하여[賈勇] 진영에 돌아왔다.

    ⇒ 七月二十四日 伏兵將鹿島萬戶宋汝悰 斂戰船八隻 遇賊舡十一隻于折 島 全捕六隻 斬首六十九級 賈勇還陣


    무술년 10월7일

     초7일,유제독(劉提督)의 차관(差官,파견관)이 도독부(都督府)에 와서 보고하기를,“육군이 잠시 후퇴하여 순천을 다시 다스려 나아가 싸우게 했다”고 하였다.

    ⇒ 初七日 劉提督差官 來告督府曰 陸兵暫退 順天更理進戰云

     

    『再造藩邦志抄』는 李舜臣관련 내용을 적은 傳寫年 傳寫者 未詳의 책이다.

    이 책은 현재 顯忠祠 유물관에『亂中日記』와 함께 소장되어 있는데, 이 기관 관계자의 기록에 의하면 “언제 누가 기록했는지는 모르나 충무공 가문과 관계있는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다.『再造藩邦志抄』라는 제목은 이 책의 卷首題가 ‘再造藩邦志抄’이므로 書誌學의 題名方法을 적용하여 붙인 이름이고, 원래는 앞표지 뒷면 2쪽에『忠武公遺事』라고 적혀 있으며, 그 다음 장에는 “忠武公遺 [事]”라고 적혀 있다. 종이 상태가 검게 퇴색한데다 落書 속에 적혀 있기 때문에 선뜻 제목으로 봐지지 않는다. 전체 내용을 보면 주로 李舜臣과 관계된 내용을 적고 있고 실제『再造藩邦志抄』의 분량이 전체내용에 비해 반도 안되므로 이 책의 제목은 표제를 따라『忠武公遺事』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申炅이 지은『再造藩邦志』에서 抄錄한 李舜臣관련 내용이 卷首부분에 적혀있다. 따라서 傳寫된 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再造藩邦志』가 간행된 1693년(숙종 19) 전후쯤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德水李氏宗家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난중일기의 도난, 회수사건이 일어난 이듬해인 1968년 3월에 草稿本『亂中日記』와 함께 影印本을 발행하였다. 당시 영인본의 表題는 朴正熙大統領이 “再造藩邦志抄”라고 揮毫하였다.

    『再造藩邦志抄』全篇은 草書로 써져 있고 이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 다만 2000년 박혜일이 草稿本『亂中日記』를 초록한 것에 해당하는「日記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日記抄」의 乙未日記와 戊戌日記의 전체원문 및「정유일기」일부를 소개하고 이것으로 기존『亂中日記』缺損부분을 복원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 논문에 발표된 日記의 원문에는 誤讀된 글자와 미상기호 처리한 글자들이 남아 있어 완전히 해독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근자에 본인은 이『再造藩邦志抄』원문전편에 대한 判讀 및 飜譯작업을 모두 마쳤다. 이 작업을 통해 기존 草稿本 및 全書本의『亂中日記』와 對校한 결과 130여 곳의 차이가 발견되었다. 또한 이는 壬辰년부터 戊戌년까지 주요 기사를 抄錄한 抄本이지만, 草稿本과 비교대상이 되는 異本으로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再造藩邦志抄(5~14쪽), 2. 井邑祠宇上樑文(14~17쪽), 3. 春秋祭享文(18쪽), 4. 三道回文(18~20쪽), 5. 上疏文(21~22쪽), 6.日記抄(23~60쪽), 7.임란에 참가한 장졸의 명단(61~74쪽), 8. 중국장수가 준 물품목록(75~76쪽), 9. 其他(鄭運과 宋希立의 자손명단)(77~78쪽).

     井邑祠宇 上樑文은 康翎[黃海]縣監 申纘(1613~?)이 짓고, 春秋祭享文은 4言律詩이고, 三道回文은 李舜臣의 祠堂管理문제를 논하고, 上疏文은 露梁에 奉安할 사당건립을 제의하였다.(光陽 선비 金慶履지음) 其他에 해당하는 맨 마지막 두쪽에 적힌 鄭運과 宋希立의 자손을 기록한 글씨는 본문 내용과는 필체가 다르게 半行으로 적혀 있는데, 1740년 이후에 후대사람이 追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적힌 宋天極과 宋應奎의 생존시기로 미루어 본 것이다.

     이 내용의 분량을 보면 총 38쪽이고 글자 수는 총 13,538여자이며, 각 날짜수는 임진일기 10일, 계사일기 9일, 갑오일기 75일, 을미일기 69일, 병신일기 76일, 정유일기 58일, 무술일기 28일이다. 干支는 모두 빠져 있고 가끔 加筆하여 수정한 흔적도 보인다. 不過 325일분의 일기를 담고 있으나 간혹 초고본『亂中日記』의 마모되어 확인 불가능한 글자 또는 빠져있는 글자가 여기서는 또렷이 적혀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을미일기는 지금까지 의존해왔던 全書本과 다른 草稿本내용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일기가 총 29일치가 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草稿本『亂中日記』에 대한 해독과 활자본의 부분적인 補完 및 定本確定을 위한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난중일기 '빠진 32일치' 처음으로 내용 밝혀져
  • 현충사 소장 '충무공遺事'에서 판독·번역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 1598)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쓴 '난중일기(亂中日記)' 중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일기 내용이 새로 밝혀졌다.

    지난 2004년 '난중일기' 원본 13만자(字) 전편(全篇)을 최초로 DB(데이터베이스)화했던 노승석(盧承奭)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는 "2006년부터 문화재청의 의뢰로 현충사에 소장된 고서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사진)'를 판독·번역한 결과 현재 전해지는 '난중일기'에 없는 새로운 일기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이번에 해독된 일기에서는 ▲'선친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1595년 7월 1일) 등 가족에 대한 애틋한 심정 ▲권율(權慄), 원균(元均) 등 다른 장수들과의 갈등관계 ▲관리들의 행태에 대한 한탄 ▲쇠약해진 병사들에 대한 연민 등 충무공의 인간적인 면모와 전란 당시의 상황이 적혀 있다. 또 지금까지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1598년 7월 '절이도(折爾島·현재의 전남 거금도) 해전'에 대한 기록도 있다.

    지난 2000년 박혜일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충무공유사'의 일부 원문과 내용을 소개했지만 이번처럼 구체적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노승석 교수는 '충무공유사'의 이 기록이 '난중일기'의 유실된 부분이라고 보는 근거에 대해 "함께 적힌 다른 일기 내용이 '난중일기'와 정확히 일치할 뿐더러 일부 글자는 '이충무공전서'(1795)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내용보다 더 정확한 것으로 보아 현재 전해지지 않는 을미년 일기 초고본 등 당시의 원자료들을 보고 필사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충무공유사'는 17세기 말 충무공과 관련된 자료들을 뽑아 초서로 필사한 것으로 덕수 이씨 종가에서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의 친필 초고본(草稿本)과 함께 전해 내려온 책이다

     

     

    영웅보다 인간적 모습 잘 드러나 전문가들
    "너무나 개인적이고 민감한 기록… 놀랍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이번에 새로 밝혀진 '난중일기(亂中日記)' 32일치의 내용들은 지금까지 전해지던 초고본(草稿本)과 목판본('이충무공전서')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을 담고 있다. 자신의 솔직한 술회를 그대로 담은 이 내용들이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에 대해 노승석 순천향대 대우교수는"충무공 사후의 편찬자들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민감한 기록'이어서 후세에 전하기에 부적절하다고 여겨 의도적으로 삭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왜 기존 '난중일기'에서 볼 수 없었나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초고본이다. 임진년(1592)부터 무술년(1598)까지 7년 동안의 일기가 담겨 있는데, 유독 을미년(1595) 일기의 초고본만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난중일기' 책에서 볼 수 있는 을미년 일기는 1795년(정조 19년)에 왕명으로 간행된 목판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수록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옮겨 적는 과정에서 글의 내용이 많이 누락되거나 수정됐다.

     

    이번에 발견된 자료를 수록하고 있는 현충사 소장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는 '이충무공전서'보다 100년 정도 앞선 17세기 말의 기록이다. 그래서 '충무공유사'의 여섯 번째 부분인 '일기초(日記抄)'에 을미일기의 일부를 뽑아 필사하는 과정에서 원래 을미일기의 초고본에는 실렸지만 훗날 '이충무공전서' 편찬 때는 누락된 내용이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 발굴된 일기 32일치 중 29일치가 을미년의 내용인 것은 이 때문이다. 나머지 사흘치는 현존 초고본에서도 빠진 부분이다.

    '충무공유사'는 '난중일기' 초고본과 함께 덕수 이씨 종가에 별책 부록처럼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현재 현충사 유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러나 그 가치에 대해 주목 받지는 못했고, 책 앞부분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는 글의 제목이 책 전체의 표제인 것처럼 잘못 알려졌다. 박혜일 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등이 지난 2000년 '충무공유사' 중 '일기초'의 원문과 내용 일부를 소개하고 "'난중일기'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모든 내용이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발견된 자료를 수록하고 있는 현충사 소장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는 '이충무공전서'보다 100년 정도 앞선 17세기 말의 기록이다. 그래서 '충무공유사'의 여섯 번째 부분인 '일기초(日記抄)'에 을미일기의 일부를 뽑아 필사하는 과정에서 원래 을미일기의 초고본에는 실렸지만 훗날 '이충무공전서' 편찬 때는 누락된 내용이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 발굴된 일기 32일치 중 29일치가 을미년의 내용인 것은 이 때문이다. 나머지 사흘치는 현존 초고본에서도 빠진 부분이다.

    '충무공유사'는 '난중일기' 초고본과 함께 덕수 이씨 종가에 별책 부록처럼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현재 현충사 유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러나 그 가치에 대해 주목 받지는 못했고, 책 앞부분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는 글의 제목이 책 전체의 표제인 것처럼 잘못 알려졌다. 박혜일 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등이 지난 2000년 '충무공유사' 중 '일기초'의 원문과 내용 일부를 소개하고 "'난중일기'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모든 내용이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영웅이 아닌 인간적인 면모 보였다"

    이번에 밝혀진 일기에서 충무공은 꿈에서 생시와 다름없이 나타난 선친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했던 심정을 토로하고, 전란 중에 아들의 혼례를 치르는 착잡한 마음을 글로 남겼다. 상급자인 권율(權慄)과의 갈등과 경쟁자였던 원균(元均)에 대한 혐오감, 순천부사 권준과 같은 부하들에 대한 불만, 전쟁 통에 서울에 있던 첩들을 관공서로 데리고 오는 관원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기록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구국의 영웅'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평가 속에 가려진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 자료"라고 평가했다. "당시 조선군 내의 권력과 지휘체계, 정치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민감한 부분들이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충무공유사'의 번역작업을 추진했던 유홍준 문화재청장(명지대 교수)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기록 문화재라면 일거수일투족이 역사적 자료인데도 읽어볼 수 없어 안타까웠고, 번역 결과 실제로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부분들이 들어 있어 놀라웠다"고 말했다.


    ◆충무공유사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던 책이지만, 겉 표지 뒷면에 '충무공유사'라는 원래 제목이 남아 있다. 책 앞부분에 실린 내용이 1693년 간행된 '재조번방지'에서 뽑아 쓴 내용이기 때문에 그 직후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난중일기' 초고본과 함께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이듬해 영인본을 발행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재조번방지초'라는 표제를 직접 썼다. '난중일기'의 내용을 뽑아 쓴 '일기초(日記抄)'는 이 책의 23~60쪽에 수록돼 있다. 모두 325일치의 일기를 담고 있으며, 초고본 중 마모돼 확인 불가능하거나 빠져 있는 글자가 보존된 경우가 많다. 61~74쪽에 수록된 전쟁 참가 장졸(將卒)의 명단 역시 귀중한 자료다.


     

    "우리나라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새롭게 밝혀진 난중일기]
    돌아가신 아버지 생신… 그리움에 눈물이 떨어져
    하늘과 땅 사이에 원균처럼 망령된 이가 없을 것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과 관련된 기존 기록들을 뽑아 필사한 17세기의 문서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재조번방지초)’는 지금까지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기 32일치를 담고 있다. ‘충무공유사’의 탈초(脫草·초서로 된 글씨를 풀어 씀)와 완역 작업을 수행한 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의 번역을 토대로, 새로 발굴된 기록들 중 주요 내용들을 뽑아 소개한다.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1595년(을미년) 정월 10일


     

    순천 부사(=이순신의 부하 장수인 권준·權俊)도 공사(公私)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들였다. 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順天公私禮, 姑留之, 而有頃招入, 同坐饋酒之際, 言辭極兇慘.


     

    (이번에 발굴된 일기에는 부하 장수인 권준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순신의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기존의 ‘난중일기’에선 찾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는 전선이 교착 상태인 채 강화 회담이 전개되고 있었고,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군량 확보에 노력하면서 다시 닥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정월 12일


     

    삼경(자정쯤)에 꿈을 꾸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오셔서 분부하시기를 “13일에 회( ·이순신의 맏아들)를 초례(醮禮·전통 혼례)하여 장가보내는데 날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 비록 4일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에 완전히 평소와도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三更夢先君來敎, “十三日送醮,  往似有不合. 雖四日送之無妨”爲敎. 完如平日, 懷想獨坐, 戀淚難禁也.


     

    (돌아간 아버지 이정·李貞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기존 ‘난중일기’에는 전쟁 중에도 수시로 사자를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대신 묻게 하는 등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적은 부분이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쓴 부분은 거의 없었다.)

    ▲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 작품이다. /조선일보 DB

     

    ●정월 15일


     

    우후(虞候·수군절도사 밑에 두었던 무관직) 이몽구와 여필이 왔다. 이 편에 “이천주(李天柱)씨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경탄함을 이기지 못했다. 천리 밖의 땅에 던져진 사람이 만나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더욱 애통과 슬픔이 심했다.


     

    虞候李夢龜及汝弼來, 聞李天柱氏, 不意暴逝云. 不勝驚嘆, 千里投人, 不見而奄逝, 尤極痛悼.


     

    (‘이천주’란 인물은 이순신의 지인으로 추정된다. 전란 중 벗을 잃은 애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정월 27일


     

    오늘이 바로 (맏아들) 회( )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흥 부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官府)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乃 奠雁之日, 心慮如何? 長興佩酒來, 其京妾亦率來于其府云, 尤可駭也.


     

    (전란 중에 혼례를 올리는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당시 관원들의 행태를 기록했다.)


     

    ●2월 9일


     

    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한 쪽에 걸렸는데, 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호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남들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그림 용이 돼 있었고,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완상하는데 그 빛과 형상이 움직이니 특이하고 웅장하다 할 만 했다.


     

    夢西南間, 赤靑龍掛在一方, 其形屈曲, 余獨觀之, 指而使人見之, 人不能見. 回首之間 來入壁間, 因爲畵龍, 吾撫玩移時, 其色形動搖, 可謂奇偉.


     

    ●3월 24일


     

    (전라)우수사(右水使=이억기)는 앉을 대청을 개수(改修)해 세우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헛소리를 많이 하며 보고해 왔다. 매우 놀랍다.


     

    右水使以坐廳改立爲惡, 多費辭報來, 可愕可愕.


     

    (‘우수사’는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이던 시절 함께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고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새로 발굴된 부분에서 이순신은 세 번에 걸쳐 이억기에 대해 못마땅한 심정을 적었는데, 역시 기존 ‘난중일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4월 30일


     

    아침에 원수(元帥=도원수 권율·權慄)의 계본(啓本·임금에게 제출하는 문서 양식)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무척 당혹스런 기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전체를 통솔했던 도원수는 다름아닌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이었다. 그는 당시 이순신 장군의 상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각각 육군과 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 사이에 이와 같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순신의 일기가 대단히 솔직한 기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1일


     

    내일은 아버지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明日乃父親辰日, 悲戀懷想, 不覺涕下.


     

    ●8월 22일


     

    강을 건너 주인집에 갔다가 그 길로 체찰사(體察使)의 하처(下處·임시 숙소)로 가니 먼저 사천현에 와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우습다.


     

    渡江入主人家, 因到體察下處, 則以先到泗川縣宿, 而不爲迎命爲言, 可笑.


     

    (기존 ‘난중일기’에는 이 내용의 앞부분에 ‘오후에 진주 남강가에 이르니 체찰사가 이미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체찰사는 비상시에 임시로 지방에 파견해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역할을 맡은 관직이다. 고위 관료의 행태를 비웃는 자세가 보인다.)


     

    ●10월 3일


     

    오늘은 (맏아들) 회( )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춰 주도록 예방(禮房)에 당부했다.


     

    乃 生日, 故酒食備給事, 言及禮房.


     

    ●10월 21일


     

    정사립(鄭思立·이순신의 비장)을 통해 들으니 “경상수백(慶尙水伯=권준)이 모함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미는데 내키는 대로 문서를 작성하고, 문서로 적게 되면 오로지 알려지지 않게 했다”고 했다. 매우 놀랍다. 권 수사의 사람됨이 어찌하여 그처럼 거짓되고 망령된 것인가?


     

    因思立, 聞“慶水伯飾誣陷辭. 倚指成文之, 而文之則專不聞”之云. 可駭可駭! 權水之爲人, 何如是誣妄耶?


     

    ●10월 28일


     

    초경(밤 8시쯤)에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크게 일었다. 이경(10시쯤)에 우레가 치고 비가 와서 여름철과 같으니 변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初更狂風驟雨大作, 二更雷雨有同夏日, 變怪至此.


     

    ●11월 1일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元兇·경상우수사 원균을 매우 낮춰 표현한 것)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만하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元均)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朝報及元兇緘答則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이순신·원균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 기존 ‘난중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이처럼 커다란 혐오감을 보인 대목은 없었다.)


     

    ●11월 4일


     

    우리 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我國兵殘力疲, 奈如之何?


     

    1598년(무술년) 7월 24일


     

    복병장(伏兵將)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이 전선(戰船) 8척을 거두다가 적선 11척을 절이도(折爾島)에서 만나 6척을 통째로 포획하고 적군의 머리 69급(級)을 벴으며 용기를 발휘해 진영에 돌아왔다.


     

    伏兵將鹿島萬戶宋汝悰, 斂戰船八隻, 遇賊舡十一隻于折爾島, 全捕六隻, 斬首六十九級, 賈勇還陣.


     

    (전쟁 막바지에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인 ‘절이도 해전’에 대한 기록이다. 절이도는 지금의 전남 거금도다. 이 승전은 지금까지 ‘선조실록’과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록’ 등에 단편적으로 등장했을 뿐 정작 ‘난중일기’에는 그 내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