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복용하는 각종 약 성분이 소화되지 않고 배출됐다가 다시 식탁으로 되돌아오는 물의 약물 오염문제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AP통신은 9일 미국 50개 대도시 상수원 등에 대한 탐사 취재 결과, 4100만명이 마시는 식수가 호르몬 제제와 항우울제, 진통제 등 각종 약물에 오염됐다고 보도했다.
약물 성분이 검출된 곳은 캘리포니아 남부와 뉴저지 북부 등 24개 대도시. 필라델피아에서 고혈압, 천식, 정신질환, 간질 등에 쓰이는 56개 약물이, 1850만명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는 항우울증제와 간질 치료제 성분이 검출됐다. 워싱턴 DC에서도 6가지 약물 성분이 검출됐다.
인간이 복용한 처방약 중 일부는 소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배설된다. 예를 들어 진통제와 항우울증제를 복용하면 주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과 플루옥세틴 중 80% 정도는 소화가 되지만 나머지 20%는 몸 밖으로 배출된다. 당뇨병 치료제 메트포르민처럼 80%가 배설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정수과정에서 이들 약물이 걸러지지 않는다는 것. 오수와 함께 강과 바다에 흘러든 약물은 정수 후에도 그대로 남아 식수로 가정에 다시 공급된다.
생수나 정수기 물도 예외는 아니다. 식용수 기준에 약물 검사 항목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미 환경청(EPA)의 벤자민 그럼블스 부소장은 "현재까지 어떤 정수 시스템도 약물을 걸러내지는 않는다"고 인정했다.
식수의 약물 오염문제는 미국인들의 약물 남용 습관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처방약 시장은 지난 5년간 16%나 증가했다. 최근 사망한 할리우드 스타 히스 레저의 사인은 항우울제 과다복용이었고 스타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약물 과용 문제는 사회적 논란을 빚어왔다.
하지만 식수오염은 미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최근 캐나다와 일본, 호주는 물론이고 스위스 호수와 북해에서도 처방약 성분이 검출됐다고 통신은 전했다.
검출된 약물 농도는 ppb(10억분의 1), ppt(1조분의 1) 수준의 극소량이다. 과학자들은 인체에 영향을 미칠 분량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특정 질병을 타깃으로 조제된 약물들을 무작위로 조합해 수십년 동안 복용할 경우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단언하지 못한다.
최근 실험실 연구 결과 미량의 약물도 인간 배아의 신장세포 성장을 늦추고 암세포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학자들은 바다와 호수에 포함된 미량의 항생제가 돌연변이 슈퍼 바이러스의 탄생을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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