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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zoo 2007. 2. 1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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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권력 포트폴리오'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전상인

지식 없는 권력은 맹목적이다. ‘알아야 면장’이라 하듯이 무식(無識)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한편, 권력 없는 지식은 공허하다. 아무리 ‘아는 것이 힘’이라 하지만 지식 스스로가 실체적 권력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겸비한 것으로 기대되는 존재가 이른바 ‘철인왕(哲人王)’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권력과 지식이란 대개 따로 존재한다. 경우에 따라 함께 만나고 사정에 따라 서로 헤어지곤 하는 것이 지식과 권력의 관계다.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특정 지식인 그룹의 부침이 매번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한 한 노무현 정권의 출범 전후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정부’의 등장에 공로를 세웠고 그들 가운데 상당한 숫자는 정부 안팎에서 집권세력의 실세 역할을 하고 있다. 지식과 권력 간의 상호의존성을 감안하면 이 자체는 놀라운 내용도 아니고 비판할 사안도 아니다.

이들 외에도 적지 않은 숫자의 ‘스타’ 지식인들이 지난 겨울꼬리와 봄머리 무렵 노무현 정부의 역사적 발진(發進)에 앞다투어 동참했다. 그런데 최근 그들의 입장에 변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불과 몇 달 전에 자신들이 했던 말이나 썼던 글과는 너무나 다르게 노무현 정부로부터 갑자기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친노(親盧) 지식인의 이반(離反) 사태는 무엇보다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막 지난 시점에 나타난 국민적 지지도 급락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우연한 것이라기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현실 참여 방식에 연관된 문제가 아닌지 싶다. 먼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특정 권력집단에 거는 부류의 지식인이 있다. 이른바 대박과 쪽박 사이를 오가는 ‘올인(all-in)식’ 투자이다. 이에 반해 또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은 자산을 여러 곳에 나누어 투자하는 안정적 방식을 취한다. 곧, 불확실한 미래 상황에 대비하여 손실 위험을 줄이고자 하는 계산법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포트폴리오(portfolio)’ 지식인이다. 한때 노 정권에 밀착했다가 지금쯤 이탈을 모색하는 행위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올인이 아니라 포트폴리오 전략에 해당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이와 비슷한 종류의 포트폴리오 지식인이 너무나 많다. 온갖 사회적 기득권을 고수하면서 개혁적 사회운동에 가담하거나, 기존의 제도권 학문에 안주하면서 진보·좌파 학계의 ‘눈 도장’을 챙기는 일 또는 자신의 체질화된 친미(親美)적 삶이 무색하게도 강의실에만 들어가면 반미(反美)주의자로 돌변하는 것 등이 그 보기다. 마치 한꺼번에 여러 보험에 가입하듯 정치적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최선의 방책은 사회적 관계자본을 분산 투자하는 데 있다고 믿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성공 가능성에 투자했다가 행여 수익률이 떨어질까 딴 마음 먹는 일쯤은 따라서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백 번 양보하여 지식인의 포트폴리오 처신 자체는 인간적으로 있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적어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투자 전략이라면 포트폴리오 방식은 치명적이다.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국가 개조 및 사회변혁 프로젝트가 시도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 앞에서 지식과 권력의 관계는 결코 통상적 판단이나 시류적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부응하는 지식인 타입은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올인이다.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비감한 역사의식을 자부하면서 그에 따른 시대과업 추진을 비장하게 자임하고 나선 노무현 정부인 만큼 지식인의 참여와 동조 방식 역시 결코 예사로울 수는 없다. 지식과 권력이 기왕 같이 가기로 했다면 고락(苦樂) 정도가 아니라 생사(生死)까지 함께할 각오를 지녀야 한다. 지식인에게 지조는 미덕이지만 처세(處世)는 악행(惡行)이다.

2003/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