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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사회, 그녀에게 잠을 허하라

aazoo 2009. 11. 28. 22:17

24시간 사회, 그녀에게 잠을 허하라

 

타이타닉호, 엑손 발데스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스리마일섬, 보팔 살충제 공장….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렇다. 세계를 뒤흔든 대참사와 연관된 고유명사다. 타이타닉호는 대서양 횡단 중 침몰했고(1912년), 미국 유조선 엑손 발데스호는 알래스카 해안을 지나던 중 암초에 부딪쳐 좌초되면서 4만여t 원유를 바다에 흘려보내 물고기·바닷새 수십만 마리를 떼죽음시켰으며(1989년),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1986년)과 미국의 스리마일섬 원전(1979년)은 끔찍한 방사능 누출 사고를 일으켰다. 미국에 본사를 둔 유니온 카바이드 사가 운영하던 인도 보팔의 살충제 공장에서는 독가스가 유출되면서 주민 수천명이 사망하는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가 일어났다(1984년).

공통점은 또 있다. 이들 사고가 모두 새벽 시간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타이타닉호 사고는 0시15분, 엑손 발데즈호 사고는 0시4분, 체르노빌과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는 각각 새벽 1시23분과 4시, 보팔 공장 사고는 0시40분에 일어났다. 2년 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당시 사고의 단초를 제공한 삼성 크레인선단이 예인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 것 또한 새벽 5시경이었다.

잠의 중요성에 대해 인간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이다.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 드는 게 자연스럽던 과거만 해도 수면 부족은 예술가나 수도승, 사랑에 빠진 청춘 남녀 따위가 앓던 개인적인 고민거리였다. 그러나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산업사회가 본격 도래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24시간 가동되는 사회는 잠들고 싶어도 잠잘 수 없는 사람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24시간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낮이든 밤이든 동일한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잠을 도둑맞은 사람들

‘잠을 도둑맞은’ 이 사회적 불면자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면 부족이 건강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상자 기사 참조). 2007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인간의 생체 리듬을 어지럽힐 수 있는 교대 근무를 발암 물질(그룹 2A)로 규정했다. 야간 작업을 포함해 교대 근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암 발병률과 동물 실험 결과를 토대로 이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여기서 교대 근무란 근무 시간의 절반 이상이 오전 8시~오후 5시 구간대를 벗어났을 때를 의미한다).

그간 수면학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이들 야간 근무자는 일반인보다 위궤양 발병률이 4배가량 높을뿐더러 심장 발작 위험도 높다. 고혈압·당뇨·비만·고지혈증 따위 질병에 일반인보다 잘 걸리며 암, 그중에서도 특히 대장암과 유방암 발병률이 증가한다. 여성은 야간 근무에 더 취약하다. 에서는 스튜어디스의 유방암을 직업병으로 인정한 판례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스튜어디스·간호사 등 야간 근무를 자주 하는 직업군 여성의 경우 임신 성공률이 일반 여성에 비해 낮고, 유산·조산율이 높으며, 출생아 체중도 평균보다 적을 위험이 많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생리 불순 또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대표 증상 중 하나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5년째 일하는 이지영씨(28·가명)는 언젠가부터 생리 주기가 한 달에 두 번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경우 한 달에 여덟 번가량 야간 근무(밤 10시~다음 날 오전 7시30분)를 하는데, 야간 근무를 시작한 지 1년쯤 지나 생리양이 줄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한 달에 두 번으로 생리 주기가 바뀌더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야간 근무를 할 때면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축축 처지곤 한다고 이씨는 말했다. 오전 8시쯤 귀가해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잠을 청해보지만 자다 깨다 얕은 잠을 반복하기 일쑤이다. 결국 ‘잠을 잔다기보다 그냥 누워만 있는 상태’로 있다 다시 야간 근무를 하러 출근하게 되기 때문에 늘 몸이 피곤하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야간 근무자의 경우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너무 피곤할 때는 의사가 구두로 내린 지시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환자에게 엉뚱한 약을 처방하기도 한다. 몇 번씩 확인하는데도 가끔 실수를 한다”라고 이씨는 고백했다. 장거리 비행을 자주 하는 비행기 조종사 ㅎ씨의 경험담은 더 아찔하다. “착륙을 앞두고 랜딩기어까지 내린 상태에서 깜박 존 적이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여름 휴가철 특별 증편으로 충분히 쉬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비행 일정을 소화하다 벌어진 일이다. 야간 근무는 집중력 저하로 인한 교통사고 및 산재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것이 그간의 연구 결과이다.

여성환경연대 회원들이 10월29일 한 대형마트 매장에서 ‘밤에는 쇼핑 말고 잠자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야간 근무가 필수인 작업장이 있다. 병원·경찰서·소방서·군대 등이 그것이다. 트럭·철도·항공·택시 등 운송업 종사자 또한 야근을 피해가기 어렵다. 문제는 최근 들어 야근이 필수가 아니어도 되는 서비스업 같은 데서마저 야간 근무를 늘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업 시간을 야금야금 연장하는 백화점, 24시간 영업하는 대형마트 등이 대표적이다.

백화점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연장 경쟁

최근들어 여름철·주말 연장 영업 등으로 영업 시간에 변화를 꾀하는 백화점이 점점 늘고 있다. 어는 고객 서비스라는 명목 아래 우수 고객(VIP)만을 초청해 특별 연장 영업(일명 ‘나이트 파티’)을 하는 백화점도 많아지고 있다. 백화점에서 일한 지 13년째라는 박선화씨(가명, 현대백화점 목동점)는 "최근 1~2년 사이 백화점들이 마지노선을 넘어서고 있다"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전만 해도 주 1회 휴무, 오후 7시30분 폐장이 일반적이었는데 이것이 월 2회 휴무, 8시 폐장으로 바뀌더니 초근에는 월 1회 휴무 약속마저 폐기하는 백화점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주말 30분 연장 근무는 기본이다.

2007년 경기도 용인에 개장한 신세계 죽전점의 경우 종전의 백화점 영업 시간에 혁신적인 변화를 준 백화점으로 유명하다. 이 백화점은 다른 백화점보다 한 시간 늦은 오전 11시30분에 개장해 두 시간 늦은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고객이 많은 점을 감안해 영업 시간을 조정한 것이다. 영업 시간을 바꾼 뒤 이 백화점 매출은 10%가량 올랐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신세계 죽전점에서 근무하는 정영미씨(가명)는 2년 전 연장 근무가 결정된 뒤 시부모와 집을 합쳤다. 밤 10시까지 근무하고 11시가 다 돼서야 퇴근하는 정씨 대신 아이들(다섯 살, 두 살)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밤늦게 퇴근해도 아내이자 엄마이자 며느리 노릇을 안 할 수는 없는 일. 아이들 재우고, 밀린 집안일을 대충 마친 다음 잠자리에 들면 보통 새벽 2시라고 정씨는 말했다. 그리고 새벽 6시면 일어나 남편 출근 준비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서울(맨위)과 한반도 주변(위) 야경. ‘24시간 잠들지 않는 도시’가 어떻게 분포돼 있는지 보여준다.
몸이 힘든 것은 견딜 만하다. 밤 10시에 일을 마치고 자가용을 운전하다 보면 한겨울에도 차창을 열고 달려야 할 만큼 졸음이 쏟아지지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나곤 한다고 정씨는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해소할 길 없는 스트레스다. “어떨 때는 며칠씩 잠든 아이 얼굴만 보기도 한다. 둘째 같은 경우 유독 엄마를 찾으며 칭얼거리는데, 그게 다 내 탓인 것 같아 괴롭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24시간 영업하는 대형마트 또한 마찬가지다. 금요일 새벽 2시, 서울 양천구 홈플러스 목동점에서 만난 한 판매원은 밤샘하기가 어떠냐고 묻자 “내 한 몸 피곤한 건 견딜 만한데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대학생인 큰아이는 상관없는데 고등학생인 둘째를 챙겨주지 못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심야 시간대 텅 빈 매장 또한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기자가 방문한 시간대 매장을 오가는 고객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같은 매장에서 오후 시간대(오후 3시~자정)에 일한다는 윤선희씨(가명)는 “심야 근무조의 경우 고객을 많이 상대하지는 않지만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심적 압박이 크다. 매대 배치를 바꿔보고 전략 상품도 배치해보지만 요즘 신종플루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에 또 다른 대형마트랑 홈플러스 익스프레스(홈플러스에서 운영하는 기업형 슈퍼마켓)가 여럿 생겨서인지 손님이 통 들지 않는다”라고 했다.

<마법의 생체 시계>를 쓴 의사 마이클 스몰렌스키는 야간 근무자가 겪게 되는 문제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자신만의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 둘째, 일을 할 때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 셋째, 일하는 도중 다치기 쉽다는 것, 넷째, 가정이나 가족이 희생된다는 것. 사회적 관계의 단절은 이들을 더 스트레스 상태로 몰아넣는다. 최근 미장원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원장이 연장 영업을 결정하는 바람에 퇴근 시간이 늦춰졌다는 미용사 현경씨(ㅂ헤어)는 “8시 퇴근할 때만 해도 학원에 다니며 취미 생활을 즐기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10시로 퇴근 시간이 늦춰지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야간 근무를 계속하다보면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김남수씨(가명)는 “야간조로 근무한 2년 동안 아내와 웃는 얼굴로 대화한 기억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한 간호사는 “너무 피곤하면 집에 가서 아이와 눈 마주치는 것조차 귀찮아질 때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야간 근무자들은 전직이 잦은 편이다. 입사 5년차인 간호사 이지영씨는 함께 근무를 시작한 동기 10명 중 지금은 4명만 남았다고 말했다. 나머지는 간호사를 그만두거나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병원 등으로 일터를 옮겼다는 것이다. 신세계 죽전점에서 근무하는 정영미씨 또한 백화점 개장 당시 150명에 달했던 같은층 매장 동료 중 현재 남은 사람은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이 다른 지점으로 전출을 희망해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결단에 맡겨놓는 것만이 해결책일까? 정민정 민간서비스노조연맹 여성국장은 사회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시간 노동, 야간 노동이 노동자의 건강권과 행복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만큼 이에 대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와 눈 맞추기도 피곤하다"

이보은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소비자들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소비자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갈수록 느는 24시간 영업이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함은 물론 각종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형마트나 백화점의 영업 시간 연장에 따라 지역 상권이 무너지고 에너지를 과소비하는 문제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밤에 꼭 해야 할 일이 아닌데도 편리하고 빠른 삶을 위해 야간 활동을 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것이 과연 정상인지 돌아볼 때가 됐다”라고 이 처장은 말했다.

외국을 다녀보면 알 수 있듯, 24시간 술과 음식을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극히 적다. 대부분 정책적으로 규제하거나 소비가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왜? 이 나라에서는 물질적인 소비만이 삶의 의미를 찾는 방식이기 때문인 듯하다고 조승헌 행복경제연구소장(경제학 박사)은 지적했다. 한국인에게는 시간 또한 돈이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열심히 시간을 착취해야 한다.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 공부하고 일해야 한다. 그 결과 한국은 학습시간·노동시간 분야에서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조 박사에 따르면, 그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동하는 24시간 체제이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24시간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린다. 그렇지 않으면 밀리니까. 그런데 일하면 일할수록, 벌면 벌수록 오히려 더 배가 고파지는 것이 한국 사회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 박사는 무한경쟁과 과소비의 주술에서 풀려나 ‘시간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우리가 진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24시간 경쟁에 치인 삶에서 벗어나 자율 의지로 삶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끔 사회 구조와 정부 정책을 바꿔나갈 때 개인도,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새벽 4시, 노동자에게는 마의 시간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몸 속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생체 리듬을 주관하는 ‘생체 시계’가 있다. 이를테면 오전 6시는 키가 가장 커지는 시간이고, 오전 10시는 지적인 능력이 가장 높아지는 때이다. 밤이면 잠을 자게끔 생체 시계는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저녁 9시면 일종의 수면 유도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분비되기 시작하고, 새벽 2시면 성장 호르몬의 혈중 농도가 하루 중 가장 높아진다.

잠을 못자게 되면 생체 시계에 문제가 생긴다. “1~2주간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에게는 술 취한 사람과 비슷한 뇌 기능 저하 상태가 나타난다”라고 임종한 교수(인하대·산업의학)는 설명했다. 그런데도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특히 새벽 3~4시가 마의 시간대다. 이 시간대에는 체온이 저하되고 집중력이 최저로 떨어진다. 산업재해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이때다.

임 교수는 “잠을 잘 때 분비되는 멜라토닌은 암·당뇨병 등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이 부족하면 각종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게 돼 있다”라고 말했다.



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연합]잦은 야근, 유방암 발병률 높여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덴마크 기업들이 수십년간 잦은 야간근무를 한 뒤
유방암에 걸린 여성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미국 CNN 뉴스 인터넷판이
16일 보도했다.


이 같은 결정은 야근이 수면습관을 바꾸고 잠을 유도하는 물질인 멜라토닌의 생산을
억제할 뿐 아니라 종양 발생과 관계된 유전자에 영향을 미쳐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에 따른 것이다.